결과에 상관없이 전해야 합니다. (에스겔 33장 1~9절)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9)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6년 7월 29일 수요일입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3장 1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오늘부터 에스겔서의 후반전이 시작됩니다. 마치 구약 이사야서가 39장을 기점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처럼 에스겔서도 33장부터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에스겔 33장 1~9절)에는 또다시 에스겔의 소명(召命)이 등장합니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전반부의 소명이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상황에서 받은 것이라면, 후반부의 소명은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에 받은 것입니다. 소명 받을 때의 상황이 달랐던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21절을 보면, 한 피난민이 급히 에스겔을 찾아와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지 1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에서 보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졌기에 완전한 절망이 찾아온 듯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난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경우의 수’를 따지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끝내 행운은 따르지 않았고 대표팀 선수들은 씁쓸하게 귀국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설령 돌아간다 한들 예루살렘은 이미 파괴되어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지금까지 교만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목이 곧고 마음이 팍팍했던 그들이 이제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자복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불순종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정답은 후자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마음이 더 완악해졌고,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다시 주어집니다. 에스겔 33장 1절부터 6절까지는 ‘파수꾼의 사명’ 7절부터 9절까지는 ‘선지자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소식은 그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점으로 비로소 입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완악했을지라도, 전하는 선지자의 마음만큼은 뜨거웠을 것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견디듯, 입으로 선포하지 못할 때도 몸짓과 삶의 순종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이 순간은, 그에게 마치 새가 날개를 단 듯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 에스겔 33장 2절 말씀에서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네 민족’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입니다. 에스겔이 파수꾼으로서 이들에게 전해야 하는 내용은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이 멸망했고 언제 포로 생활이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라도 악에서 돌아서라,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다’라고 에스겔은 말합니다. 절망에 빠진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는 예루살렘이 절대로 멸망할 것으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이 충격 때문에 그들은 에스겔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니지만, 에스겔 33장 9절과 10절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가 예상되는 사역은 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결과가 뻔히 보이는 운동 경기라면 뛰어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파수꾼의 사명이란, 실패가 예상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사역입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경기라 할지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실패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파수꾼인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와 상관없이 전해야 합니다.
성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만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패가 예상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씨는 좋은 밭에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가시밭에도 돌 짝 밭에도 길가에도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일’과 ‘교회의 일’의 차이점입니다.
수백 장의 전도지를 돌려도 한 사람이 돌아올까 말까 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도를 멈춰야 할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루에 무조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보를 나누어 주든, 사영리(四靈理 네 가지 영적 원리) 전도지를 전하든, 날마다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장차 ‘전도 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히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먼저 대상을 선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인상이 너무 험악해, 복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어.” “저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아.” “저 사람은 너무 어리고, 나와 성별도 다르고, 외국인이잖아…”이처럼 우리가 먼저 한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물을 주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코카콜라는 세계적인 상품입니다. 아마 코카콜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코카콜라 회사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텔레비전이나 매체에서는 코카콜라 광고가 쉼 없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떠나는 사람보다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세대에게 끊임없이 코카콜라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전설적인 코카콜라의 회장 로버트 우드러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목표는 내 생전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코카콜라를 한 번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지구상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봤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이 ‘코카콜라’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코카콜라’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코카콜라를 전할 수 있다면 복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를 전해야 한다면 복음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를 복음의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루 한 사람에게 교회 주보를 나눠주든, 사영리 전도지를 나눠주든, 삶으로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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