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장 23~33절)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3월 13일 금요일입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23절부터 33절까지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은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음 한편에는 돈과 명예와 같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공간을 채울 수 있다.”라는 말을 파스칼이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계기는 수녀원에 있는 동생을 방문하며 기도와 명상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회심하기 전, 그는 사교계와 지성계에서 매우 유명한 인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늘 불안과 절망감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파스칼에게 임했는데, 파스칼은 이것을 가리켜 ‘불의 밤(Night of Fir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뜨거운 성령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파스칼은 이렇게 만난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과 구약성경 족장들이 만난 하나님을 같은 분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만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성경 속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밖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장 속으로 어떻게 다가오실까요?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어제 바리새인들에 이어서 오늘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따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흠집을 내고 예수님의 말씀에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 그들의 방문 목적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예수님의 사역에 오류가 있고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타나시는가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립니다.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말고 죽은 남편의 동생들과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둘째 이후의 동생들은 절대로 그 형수와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실례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의 내용을 스스로 어겨가면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태복음 22장 28절을 원문대로 번역해 보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활이 있다면, 그 여자는 일곱 명의 형제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 모두 그녀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이런 모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이런 경우, 이 여성은 첫 남편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오늘날 현대사회에는 결코 적용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소위 말하는 계대결혼, 형이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형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말고, 동생들과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너무나 비인격적인 제도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려의 차원에서 이러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아랍, 흰두교, 심지어는 가까운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내용을 근거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십니다. 첫 번째는 ‘잘못된 부활 사상’입니다.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현세의 연장선이 아니라 지금의 모든 관계를 초월하고 지금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내세와 현세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애굽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환생한다고 믿어 ‘미라(mirra)’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생의 교리 때문에 사람은 다시 이 현세로 돌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사상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지금 세상의 질서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서가 부활의 세계에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이 땅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울까요? 현재 우리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과 자녀를 통하여 후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부활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천국에서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가 근본적으로 필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과 현실의 괴리(乖離)’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 성경 밖으로는 나오실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3월의 21 독서인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책을 보면 ‘참된 지식은 현실의 삶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응용과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지식과 현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묻는다면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금의 현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고 절대 진리이지만, 그 ‘성경의 목적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성경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 그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우울증과 불안감을 고치시고, 자신의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성경 안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밖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22장 32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절박한 간구를 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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