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2026년 6월 16일(화) 똑! 똑! 똑! 아침밥 왔습니다.(고전 15:35~49)
    2026-06-15 21:10:16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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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야 사는 남자 (고린도전서 1535~49)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6616일 화요일입니다. 오늘도 좋은 날, 오늘도 복된 날입니다. 주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35절부터 49절입니다. <죽어야 사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죽어야 사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옛날 어떤 무명 배우가 있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항상 죽는 역할이었습니다. 감독이 원할 때, 극의 흐름에 맞춰 가장 확실하게 죽어야 연기력을 인정받고 다음 작품에 배역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누군가는 해주어야 합니다. 죽는 연기가 실감 나면 날수록 주인공의 모습이 더 부각(浮刻)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배우가 나 죽기 싫어! 내가 왜 죽어야 해?”하고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우로서의 수명도 끝이 나고 현실의 삶도 끝나 버립니다. 다시 말해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배우가 극 중에서 잘 죽어야 현실 속에서 잘 살 수 있다라는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부활의 논리와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일치합니다.

     

    첫 번째,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고린도전서 1535~36절입니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합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부활할 때 육신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영으로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죽지 않고서는 절대 부활을 맛볼 수 없다.”라고 강력하게 대답합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의 몸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몸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을 때, 그 몸이 화장되든 매장이 되어 다 썩어 문드러지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화장하면 부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시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 때에 얻게 되는 몸은 지금 우리의 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는, 멋지고 아름다운 영광의 몸을 우리가 부활 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542~44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부활의 몸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마치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나 에녹처럼 자신들은 이미 부활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없이 하늘의 영광을 얻었다는 매우 교만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만 싹을 피우듯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죽음은 축복입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꽃이 되듯 우리는 완전히 죽어야 제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모두 되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시작입니다. 홍콩의 장국영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이 사람이 출연한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패왕은 초나라의 왕 항우를 뜻하고, ‘별희항우를 사랑한 우희라는 여인의 이름입니다. 항우는 일생토록 오직 한 여인만 열렬히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패왕별희는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경극입니다. 그런데 경극의 특징은 한번 맡은 배역은 영원토록 바뀌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극 중의 배우들은 실제의 삶과 극 속에서의 역할을 혼동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희의 역할을 맡은 남자 배우는 자신이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실제로 패왕을 사랑하게 되어 패왕의 부인과 갈등 관계가 됩니다. 영화 패왕별희는 이처럼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함으로 일어난 경극 배우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배우들처럼 현실과 극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 속에서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실패한 것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 중에서의 임시 역할일 뿐입니다. 아니, 다음 작품에서 더 멋진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감독의 큐(cue) 사인이 떨어지면 그 배우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 분장실로 향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극 중에서 죽었다고 해서 좌절할 것이며 누가 극 중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cut)’ 사인과 같은 것입니다. 우주 최고 거장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배역을 모두 마쳤을 때,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다음 무대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입을 최고의 의상을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다음 무대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최고의 의상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고린도전서 1537~41절까지입니다.

     

    세 번째, ‘이 모든 일에는 반드시 연출자가 있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하나님은 우주 최고의 거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모든 부활의 사건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지닌 하나님의 연출과 감독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엄청난 일들이 이루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능력으로 이 모든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부활은 하나님의 제2의 창조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본문 고린도전서 1545절입니다. 45절에서 두 사람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고, 또 한 사람은 마지막 사람 아담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어떤 것이 다를까요?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진 후 생령(生靈)이 부어진 존재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후 그 코에 생기가 부어지니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첫 번째 아담처럼 생령(生靈)이 부어진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생령(生靈)을 부어주는 존재입니다. ,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심으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은 잘 믿으면서 이 부활에 대해서만큼은 잘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창조의 이야기는 믿을지라도 부활의 이야기는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창조의 이야기는 곧 부활의 이야기이고 부활의 이야기는 곧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첫 번째 창조가 하늘과 땅의 창조라고 한다면 두 번째 창조, 새로운 창조는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부활에 관하여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그것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며, 오늘의 메시지를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위한 조건이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둘째, ‘부활 이후에 주어지는 새로운 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셋째, ‘부활의 사건은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태초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본문을 통하여 부활에 관한 귀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부활의 신비를 잘 깨닫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그 놀라운 부활의 능력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청파동의 모든 교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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