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 (나훔 2장 1~7절)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1. 무신론자에게 “왜 당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왜 저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눈에도 세상의 악인들은 제대로 된 심판을 받지 않는 듯 보입니다. 오히려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더 당당하게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악인을 수퍼 히어로(영웅)가 나타나 시원하게 응징하는 내용이 인기를 끕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참교육’이라는 드라마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법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악인을 향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현실은 ‘사이다’가 아니라 ‘고구마’를 먹는 듯 가슴이 꽉 막힙니다.
2. 이러한 답답함은 오늘날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련하여 전도서 8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처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죄를 짓자마자 벌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함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더디게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더뎌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오늘 본문 나훔 2장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답을 줍니다.
3. 나훔서가 기록될 당시, 앗수르는 고대근동(古代近東 ‘대체로 오늘날의 중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최강 대국이었습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칼날에 멸망했고, 남유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언제 앗수르 군대가 밀고 들어와 모든 것을 쓸어 버릴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백여 년 전,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분명히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다시 폭력과 기만으로 온 세상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최종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본문 나훔 2장 1절입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기서 ‘파괴하는 자’는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사실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조롱입니다. 아무리 성을 쌓고 길을 지키며 힘을 굳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철저히 방비해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4. 그런데 나훔 2장 1절의 무서운 심판 선언한 직후, 2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여기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약탈자 앗수르에게 짓밟혀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풍요와 존귀함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악인을 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의 진짜 목적은 ‘짓밟히고 약탈당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이 더디게 느껴질 때를 기억하십시오.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는, 우리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이 숨겨져 있습니다.
5. 나훔 2장 3~5절은 니느웨를 향해 진격하는 연합군의 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나훔 3~5절입니다.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나훔 선지자는 이후에 일어날 니느웨의 함락을, 마치 눈앞에서 생중계하듯 그려내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심판 도구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 생생한 묘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한 번 정해지면 반드시, 그리고 신속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인간의 그 어떤 권세도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가 짧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결코, 어김없이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6. 마지막 나훔 6~7절은 니느웨가 완전히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을 보여줍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같이 슬피 우는도다’ 한때 세상의 모든 부와 영광이 모여들던 도성이, 한순간에 극도의 수치와 모욕의 자리로 뒤바뀝니다. 왕후의 벌거벗음은 앗수르가 경험할 극도의 수치와 모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하고 무서운 심판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불의함을 보며 너무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악의 성벽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7. 나훔 선지자 이름의 뜻은 ‘위로’ 또는 ‘위로자’입니다. 세상은 불의하고 법의 심판은 더디며, 악인은 여전히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훔 2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하며, 그 심판은 곧 ‘자기 백성을 향한 최고의 위로’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루, 눈앞의 현실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하나님, 악인이 활개를 치고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시야를 거두어 주시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때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주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인내하는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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