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길-넷째 날
희생의 길 (마태복음 26장 17~30절)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2025년 4월 17일 목요일입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넷째 날입니다.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26장 17절부터 30절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몇 주 전, 항존직 피택자 교육 시간에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인생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식사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피택자들은 다양한 답변을 하였는데요, 어떤 분은 냉면을, 어떤 분은 비빔밥을, 어떤 분은 치킨을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고 답변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택자는 공통으로 이것이 가장 먹고 싶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 청파동교회의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식당 밥입니다. 노회 모임이나 시찰회 모임을 가면 가장 먼저 그 교회의 식당 메뉴를 살펴보게 되는데, 우리 교회처럼 다양한 반찬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교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단연 독보적입니다. 이 시간을 빌려서 식당에서 수고하시는 모든 주방 팀과 봉사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이라는 유대인들의 명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명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잔치를 가리켜 ‘세데르’ 혹은 ‘파스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잔치 때 먹는 음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무교병’입니다. 그들은 괴로웠던 애굽의 종살이를 생각하면서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부피가 작아서 가방에 많이 넣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여행자들에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포도주’를 먹습니다. 포도주는 사람을 흥겹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러한 포도주를 드셨다고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치료제로도 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포도주를 부어 강도당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고추냉이’를 먹습니다. 고추냉이의 맛이 어떻습니까? 아주 맵습니다. 눈물이 절로 납니다. 즉, 고추냉이의 매운맛이 눈물 나는 애굽의 생활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들은 ‘쓴 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의 고단했던 생활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은 ‘양고기’를 먹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먹는 이 음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양고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을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갔습니다. 양의 피는 구원의 피, 생명의 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에는 그 중요한 ‘양고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12장과 누가복음 22장, 요한복음 13장을 읽어보아도 양고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이 진정 유월절 잔치가 맞는가?’라고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왜 오늘의 본문에는 양고기가 등장하지 않을까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예수님 그분 자신이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이 바로 내 몸이다!’ 포도주는 나눠주시면서 ‘받아서 마시라 이것이 바로 내 피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어린양의 제물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즉,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려 너를 살려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나는 너를 위하여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내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주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렇게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143장의 가사처럼 말이지요.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내 몸이 얼마나 부족하든 지 간에, 내 몸이 얼마나 허약하든 지 간에,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이 고백,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어제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서 아침 식사하며 인간극장이라고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잠깐 보았습니다. 200일밖에 되지 않은 너무나 예쁜 아기가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이 아기의 아빠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서울맹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근무하는 마흔네 살 안승준 씨가 바로 이 아기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아빠가 아기를 얼마나 극진히 보살피는지,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채우며 육아를 담당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마흔 넘어 얻은 아들이라 예쁘기도 하지만, 평소 육아를 도맡아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는 최선을 다해 육아에 전념했습니다. 맹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안승준 씨는 본래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매우 잘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세 살 때 뇌수술을 한 뒤,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후천성 장애인이었던 것입니다. 한창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못 보게 되었으니,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한 절망에 빠져있을 무렵, 어느 날 복덩어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승준 씨 아내 공혜균 씨입니다. 그녀는 비장애인입니다. 업무상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일주일 만에 연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 부모님은 “더 이상 너는 내 딸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 딸의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했습니다. 결혼식장에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말 못 할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이렇게 귀한 아들 ‘햇살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모든 것이 행복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하마터면 그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 가운데 살아갈 뻔했습니다.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 몸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 몸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얼마나 멋진(감사한) 고백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헌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헌신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헌신할 수 있는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허약하고, 너무나 부족한 몸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드리고자 합니다. 귀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남 주기 아까워 가만히 썩이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쓰임 받는 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주님 부르시는 곳으로 어디든지 달려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기점으로 기도의 자리, 전도의 자리, 선교의 자리 더욱 잘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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