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토) 똑! 똑! 똑! 아침밥 왔습니다.
진리 안에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이서 1장 1~13절)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1. 사도 요한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가 쓴 요한복음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약 56회 나오고, 앞서 살펴본 요한일서는 다섯 장밖에 안 되지만 46회나 ‘사랑’이 언급됩니다. 초대교회의 전승(傳承 풍속이나 문화 따위를 물려주어 잇게 함)에 따르면 사도 요한을 불러 설교를 들을 때 늘 하는 말이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런 말을 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님, 사랑 말고 이제 다른 말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입만 열면 ‘사랑,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못지않게 사도 요한이 강조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진리’입니다. 참고로 ‘진리’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서는 1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각 3회 사용되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무려 25회가 등장합니다.
2. 오늘의 본문 요한이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 13절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진리’가 5회, ‘사랑’이 4회나 등장하며 두 단어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서신입니다. 또한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 서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는 관계)으로 작동하는지, 이 조화가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지키는지 가르쳐 줍니다. 먼저 요한이서 1장 1~2절을 공동 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원로인 나는 선택받은 귀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3.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의 이유는 ‘아름다워서’ 혹은 ‘정 때문에’, ‘성격이 잘 맞아서’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사랑의 이유를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솔직히 이런 말이 우리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기초는 어떤 취향이나 혈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임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교회 지체를 향해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자 진리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합니까? 요한이서 1장 4~5절을 보겠습니다.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한은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며 처음부터 받은 계명’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6절에 사랑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정의합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랑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계명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5.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겠습니다. 기차는 아무 길로 다니지 않고 선로 위를 달립니다. 기차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기차가 달리는 선로는 ‘진리’ 또는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기차가 선로를 벗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큰 인명 피해로 이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아무리 뜨겁고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탈선이고 재앙’입니다. 진리의 선로 위를 달리는 것만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6. 사도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요한이서 1장 7절에 이어집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초대교회를 위협하는 영지주의 이단들도 정통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리 안에 있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이 어떻게 더러운 인간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올 수 있겠느냐는 논리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가현설(假顯說)’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를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실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보이는 환영이나 유령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뿌리를 자르는 것이요, 사도 요한의 말대로 당시 교회 공동체를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였습니다.
7.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요한이서 1장 10~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구절만 떼어보면 “역시 기독교는 배타적(排他的)이야!” “교회는 꽉 막혔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왜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이런 극단적인 말까지 했을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집에 들이고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친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의 사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진리의 경계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할 때 분별력 있게 해야 합니다. 진리를 벗어난 무분별한 사랑은 교회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사탄에게 이용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진리 가운데 머무르는 사랑이 되고, 말과 혀로만 그치는 사랑이 아닌 ‘진리를 행함으로 인정되는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님, 우리의 사랑이 견고한 진리 가운데 터를 잡게 하옵소서. 그리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입증되는 가시적인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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