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이야기 (에스겔 20장 1~5절)
(1) 일곱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인자야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너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5)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어제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게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의 ‘복’은 ‘참된 회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애통해하는 노래를 지으라고 하신 것은 이 슬픈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스겔 20장 1~5절)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여호와의 뜻을 물으려고 에스겔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1절만 읽으면, 장로들이 이제 정신을 차렸구나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십니다. 왜 이렇게 반응하셨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와 앉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여전히 우상 숭배 중이었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에 점집을 찾아가 “언제쯤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무엇을 바꿔야 내 뜻대로 일이 풀릴까요?” 물어보러 다닙니다. 질문의 목적은 나의 안위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겠다고 에스겔을 찾아왔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나의 뜻에 맞춰 좀 변경하실 수 없는지 묻기 위함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이 점집 찾아간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다 들여다보고 계신 겁니다. 에스겔 20장 4절입니다. ‘인자야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너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라’ “심판하려느냐?”라는 말은 “심판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가증한 일을 후손인 너희들이 똑같이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건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오늘 본문 에스겔 20장 5절에서도 말씀하시는,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는 소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굉장히 자주, ‘너희를 애굽 땅에서 건진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매우 큰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완성이 된 사건은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며 경험한 사건입니다. 앞뒤로 꽉 막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고, 그 바다를 건넘으로 출애굽이 완성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이 뭘 알게 됐을까요?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신 것을 눈으로 봅니다. 몸소 체험합니다. 주인이 바뀌는 경험. 죄와 죽음의 권세인 파라오의 질서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 중에 ‘홍해를 건너는 일’은 필수입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에서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고 바울은 또 말합니다. 로마서 6장 3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홍해를 건넌 것이 왜 세례받은 일이며, 세례가 왜 죽음의 사건일까요? 자, 바다가 갈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장면을 옆에서 보면 전부 물에 빠져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다스림을 상징하는 이집트 제국의 왕 파라오와의 연합을 끊는 것입니다. 영화 속 대화를 보면 “우리 조직에 들어오는 건 네 선택이었는지 모르지만, 나가는 건 죽어야 나갈 수 있다.” 파라오의 조직에서 탈퇴하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파라오의 질서 안에서 살면서 장착된 관점, 삶의 방식, 방향성, 이걸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홍해 안으로 걸어 들어간, 세례의 의미입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었다.’라는 것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끄집어내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죽음으로 끝날 우리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뛰어들어 와, 대속(代贖)의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고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잊고 살면, 우리의 걸음은 자꾸만 가증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교회에 나와 어떤 이야기 듣기를 기대하십니까? 급변하는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최신 동향에 대한 팁을 얻으러 교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매주,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에 나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듣고 또 듣기 위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속 에스겔은 최신, 최강, 최고를 좇는 바벨론 제국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또 꺼냅니다. 너희가 왜 여전히 그 가증한 것을 좇아, 어리석음과 죽음의 길로 제 발로 걸어가는지,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 말해 주는 옛이야기를 되새기라고 권면합니다.
용서 받을만한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시려고 그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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