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홀라’와 ‘오홀리바’ (에스겔 23장 1~21절)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7)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8)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 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 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의 ‘만나’로 우리의 영과 육을 새롭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하나님과의 회의’를 시작합니다.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8월 27일 수요일입니다. 이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1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루하루 다가오던 어느 날, 또다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음행하는 두 자매의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경고하십니다. 두 자매 중 언니의 이름은 ‘오홀라’이고 동생의 이름은 ‘오홀리바’입니다. 얼핏 들었을 때, 그들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이름처럼 들리지만, 실제 그들의 행실은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여인에 가까웠습니다. 언니인 오홀라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동생인 오홀리바는 남왕국 유다를 상징합니다. 이제 비유로 소개되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너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들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 여인들은 어릴 때부터 애굽에서 음란하게 몸을 팔았는데 애굽의 사내들로부터 온몸을 유린당했다. 두 여인 가운데 언니의 이름은 ‘오홀라’고 동생의 이름은 ‘오홀리바’다. 그들은 본래 나와 결혼하여 내 자녀를 낳은 여인들로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 23장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두 자매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본래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 결혼한 신령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신령하고 거룩한 신부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매우 타락하고 음란한 여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결혼하기 전 그들은, 애굽에서 창녀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구제 불능의 존재, 이미 우상숭배로 물들어 있어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죄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는 조금의 은이나 금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타락하여 나중에 찌꺼기처럼 변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은 이기적인 욕구로만 가득한 가치 없는 금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과장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경의 표현대로, 태초부터 그들 안에 죄만 가득하고 성장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는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그 어떤 민족보다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부흥할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죄의 길을 걸어가자 너무나 실망하신 나머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 23장 5절부터 10절은 ‘오홀라’인 사마리아에 초점을 맞추어 사마리아가 어떻게 음행했는지를 하나님께서 고발하십니다. 사마리아의 본래 남편은 하나님입니다. 사마리아는 본래 하나님과 결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앗수르와 바람을 피웠고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은 또다시 애굽과 바람을 피웠고 이것에 질투를 느낀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멸망시켰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결국 사마리아가 멸망 당한 이유는 앗수르와 바람을 피우다가 그 상대를 애굽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사마리아가 앗수르의 질투를 받아 멸망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 멸망은 하나님을 배반한 사마리아에게 하나님이 질투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23장 9절과 10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에스겔 23장 11절부터 21절은 이러한 사마리아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교훈도 받지 못한 채 똑같은 길을 걸어갔던 예루살렘 멸망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역시 하나님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와 연애를 하다가 나중에는 바벨론과 바람을 피웁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연애하고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그들을 더 많이 의지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예루살렘은 또다시 마음이 변하여 애굽과도 연애합니다. 이에 배신당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이제 곧 멸망시킬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스스로 서지 못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뿐,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돈이든 그 어떤 것도, 성도의 근본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과 같은 외부의 세력을 의존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힘과 멋진 모습에 매료되어 하나님보다 그들을 더욱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백성은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라는 독일의 시인 볼프 비어만의 말처럼,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헛된 희망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로 하루의 길을 닦고 말씀이 그곳을 지나가게 한 뒤, 성도들이 걸어가야 한다’라는 여호수아서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어 오늘도 우리의 삶에 참된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를 보면 희망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김 씨는 서울시 도봉구 출신으로 구조조정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모자라, 많은 빚까지 져 한강에서 투신자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실패로 끝나 여의도 밤섬에 있는 어느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못하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부닥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인공이 어느 날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짜장라면 봉지에 쓰여있던 ‘희망 소비자가격’이라는 글자에 쓰인 희망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는 이 글자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도 가르쳐 줍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으로 우리의 길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보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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